재정위기에 취업난 … 유럽인들 “외국인 막아라” 아우성
[중앙일보] 입력 2012.07.18 01:48 / 수정 2012.07.18 01:49
흔들리는 유럽통합·다문화주의
영국에서는 9일 새 이민법이 시행됐다. 이에 따르면 연봉 1만8600유로(약 2600만원)가 안 되는 이민자는 배우자를 영국에 데려올 수 없다. 자녀가 있을 경우 연봉 2만2400유로(약 3100만원)가 넘어야 한다. 이민 배우자의 국적 취득 심사 자격도 2년에서 5년 거주로 강화됐다. 심사 때 요구하는 영어 수준도 높아졌다.
유럽통계청(Eurostat)에 따르면 영국은 유럽연합(EU) 가운데 독일·스페인·이탈리아에 이어 이주민이 많은 나라다(2011년 기준). 영국은 다른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제2차 세계대전 후 노동력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이전 식민지 국가로부터 이주민을 받아들였다. 현재 거주하는 파키스탄 출신만 120만 명에 이른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경기침체로 실업률이 높아지면서 사회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이주민이 일자리를 뺏고 주택·연금·교육혜택을 잠식한다는 불만이다.
특히 저임금에 한정됐던 이주민 고용이 고학력·고임금 시장까지 파고들자 위기감이 높아졌다. 이민와치UK에 따르면 비EU 출신 유학생이 졸업 후 영국에서 취직하는 숫자는 2004년 8700명에서 지난해 4만 명으로 급증했다. 보수신문 텔레그래프는 이것을 영국 대졸 실업률이 20%까지 치솟은 원인으로 추정했다. 취업자나 유학생이 동반하는 가족 이주민도 부담이다. 텔레그래프는 “이민 문제를 제기하면 ‘벽장 속 인종주의자’로 치부하던 정치권이 더 이상 이를 외면할 수 없게 됐다”고 지적했다. 영국의 이민 빗장은 유럽 전역에서 강화되는 ‘불법 이주민 단속’과도 관련이 있다. EU 국경관리기관인 프런텍스(Frontex)에 따르면 지난해 EU로 유입된 불법 이민은 14만1000명으로 2010년의 10만4000명에 비해 35%나 늘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북아프리카에 몰아친 ‘아랍의 봄’ 난민들이다. 튀니지·이집트·리비아 등에서 벌어진 도미노 민중봉기 과정에서 수만 명이 안전과 일자리를 찾아 유럽으로 떠났다. 특히 그리스와 터키 국경을 통해 들어온 이들이 5만5000명에 이른다. 엄격하지 않은 터키의 비자 정책과 재정난에 빠진 그리스 경찰의 허술한 국경관리를 노린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15일 “그리스가 유럽으로 통하는 뒷문이 되고 있다”면서 그리스에 있는 사람 20명 중 1명은 불법 체류자로 추산된다고 보도했다. 마찬가지로 골머리를 앓는 나라가 이탈리아다.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튀니지를 마주한 람페두사 섬 등엔 지난해만 3만 명의 ‘민주화 난민’이 몰려들었다.
다급해진 이탈리아는 EU 차원의 분담을 요청했지만 외면당했다. 이에 이탈리아는 난민에게 6개월짜리 임시거주증을 발급했다. EU 역내 국가 간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는 솅겐조약(Schengen agreement)에 근거해 다른 나라로 갈 수 있는 길을 터준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가 국경을 막고 난민을 되돌려 보냈고 이탈리아가 다시 솅겐조약 위반이라고 반발하면서 외교 갈등으로까지 번졌다. 솅겐조약은 유로화와 더불어 EU 통합의 상징이다. 하지만 지난달 EU 27개 회원국 내무·법무장관은 불법 이민이 급증할 경우 솅겐조약의 적용을 최장 2년간 중단할 수 있는 개정안에 합의했다. 한 회원국이 불법 이주자 단속에 ‘지속적으로 실패할 경우’ 이웃 나라들이 국경 검문소를 다시 설치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개정안 합의에는 독일과 프랑스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 이들은 비EU 난민뿐 아니라 경제난에 빠진 동유럽 이주민의 유입도 탐탁지 않게 여긴다. 지난해 독일로 이주한 그리스인은 2만3800명으로 전년보다 90% 이상 급증했다.
EU 집행위와 유럽의회는 개정안에 반대 입장이다. 마르틴 슐츠 유럽의회 의장은 “제한 없는 노동력의 왕래는 EU 통합을 떠받치는 가장 든든한 기둥 중 하나”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치솟는 실업률과 연금 고갈로 허덕이는 유럽인들이 이주민이나 EU 통합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프랑스·그리스 등 각국에서 극우정당들이 약진하는 게 이를 반영한다. 유럽 기독교문화에 동화되길 거부하는 극단적 무슬림의 테러는 이런 혐오를 강화해 왔다. 지난해 7월 노르웨이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의 노동당 캠프 테러도 무슬림 이민에 관용적인 집권 노동당에 대한 불만에서 나왔다. 샐러드볼 다문화주의와 ‘하나 된 유럽’을 내건 EU 통합의 꿈이 거센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